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용인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 용인 전투의 결과로 직접적인 병력 손실은 크지 않았다할지라도 기껏 모인 장수들과 병사들이 흩어졌고, 사기도 많이 떨어져 도성을 수복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한양이 탈환된 것은 1년 뒤인 1593년 5월의 일로, 일본군은 그동안의 피해와 권율이 이끈 [[행주대첩]], 죽산성을 점령한 [[황진]]의 추격 등으로 인해 한계에 이르러 1593년 4월 한양에서 물러났고, 이를 무혈 입성하는 것으로 탈환하게 된다. 대국적으로 보아도 이 전투의 결과는 무시하기 힘들다. 수도 탈환이라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도, 만약 근왕군이 한양을 탈환했으면 당시 평양을 공격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보급로를 끊을 수도 있었고, [[함경도]]로 진격하던 [[가토 기요마사]]를 배후에서 압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용인 전투 한 달 뒤에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의 승리로 결과적으로는 일본군의 보급로가 끊어졌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중에 결과만 두고 본 일이고, 만약 근왕군이 용인 전투에서 승리하고 한양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 시점이 임진왜란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도 있었다. 즉 용인 전투에 한해서는 어떻게 봐도 와키자카의 대전과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용인 전투 패전 이후에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전라도 지역으로 들어갔다. 불행중 다행으로 [[이치 전투]]에서 승리했기에 망정이지 삼남 지방 전체가 일본군에게 넘어갈 위기였다. 단기적으로 봐도, 조선은 임진왜란 초기 삼남 지방에서 관군의 영향력이 대폭 감소한 계기가 된다. 왜냐면 용인 전투 패전 이후에 지방에 있던 병력과 용인 전투 이후 흩어진 병력들이 관군이 아니라 지방 유력자들에게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임란사에 입문할 때 가장 큰 혼란을 경험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원래 군 지휘관인 게 당연한 목민관이 의병장'''이라거나 '''의병인데 신분이 관군'''인 등등 관군과 의병이 서로 칼로 두부 자르듯 딱딱 나눠지지 않고 이리저리 뒤섞인 형태라는 것이다. 당장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과 [[조헌]]이 동원한 의병이 이치 전투에 동원된 관군 총 병력보다 많은 판이라... 다만 조선에서 60세 이하의 성인 남성은 법적으로 모두 예비군 비슷한 위치였기에, 장교가 전시상황에서 예비군을 소집해 끌고다닌거라고 생각하면 좀 이해가 쉬울것이다. 어차피 실제로도 전쟁 후반이 되면 의병조직은 점차 관군으로 재편성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